마음의소리

남궁인의 시청타촉 - 전공의 P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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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P씨의 일일

1

 정신병 환자 S(여, 48) 씨의 증세는 날로만 깊어져 갑니다. 발병 초기엔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봤지만 침만 한 바가지 흘리고 관뒀습니다. 먹어봤자 정신이 혼미하기는 마찬가지더라구요. 병수발에 지친 남편은 몇 년전에 도망가고, 환청, 환시, 환후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꽤 자유로운 삶입니다. 환청이 들리면 답하고, 환시가 보이면 같이 뛰어 놀아요. 최근엔 친했던 동무들을 하나하나 환시로 만나고 있어요. 덕분에 외롭지는 않죠. 오늘은 그토록 나를 미워만 하다가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고 나갔던 남편이 다정한 얼굴로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우리는 오랫만에 따뜻한 대화를 나누었어요. 근데, 갑자기, 남편이 복통으로 배를 감싸쥐어요 ! 배가 끊어질 듯이 아프데요 ! 장롱 속에 들어가서 꼼짝 할 생각을 안해요 ! 이걸 어쩌면 좋죠?

2

  오늘도 불철주야 눈썹 휘날리게 현장에서 수고하는 119 대원 N (남, 32) 씨는 퇴근 전 마지막 지령을 받고 현장에 도착합니다. 퇴근하고 맥주 한잔하러 가기로 동료들과 약속도 해놨구요. 복통 환자 한명만 실어다주면 오늘 일은 끝이죠. 급한 마음에 초인종을 눌러 들어가니 아줌마 혼자 있습니다. 분명히 환자는 남자라고 들었는데요. 환자는 어디있냐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단호한 표정으로 장롱 문을 벌컥 열고 잘 개켜 있는 이불 한채를 가리킵니다. "우리 남편이 배가 끊어질 듯이 아프데요!"

'아!!!!!!'

 만감이 교차합니다. 많은 진상을 봤지만, 세상은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저기, 이불은 이송 대상이 아닙니다. 이래야 하나? 하지만 단호한 표정을 봐서는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아픈 사람은 있잖아. 배가 아픈게 아니라 정신머리가 아픈 거지만. N씨는 빠른 퇴근을 위한 구국의 결단을 합니다. 그냥 다 실어다 병원에 놓자.

  이송을 하려니깐 이불을 모시는 아주머니의 자세가 보통 확신에 찬게 아닙니다. 이불을 정성스럽게 119 카트에 눕혀서, 떨어지지 않게 안전벨트도 채웁니다. 진짜 환자인 S씨는 보호자 간이의자에 앉아 이불을 간호합니다. 저 정성스러운 표정 ! 역시, 내 결정은 옳았습니다 !

3

  신규 응급실 간호사 J(여, 24)씨는 몰려드는 환자로 정신이 빠질 지경입니다. 가뜩이나 일이 부정확하다고 존경하는 챠지 선생님에게 매몰차게 혼쭐이 나는 처지인데, 야속한 환자들은 줄어들 기미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 한줄기 빛처럼 아비규환을 뚫고 범상치 않은 119 침대가 응급실을 가로지릅니다. 자세히 보니 뭔가 화려한 무늬가 실려 있습니다. 아니 ! 안전벨트를 찬 이불이라니 ! 119 침대에는 각종 인간같지 않은 것들이 실려 오지만 인간이 아닌 것이 실려오는 것은 처음 봅니다. 이불은 안전하게 누워있다가, 침대를 접으니 이쁘게 일어나 앉기도 합니다. 허허,

  사정을 듣자 허탈합니다. 왜 인간도 아닌 이런 걸 싣고 왔는지 원망스럽고,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이글거리는 보호자의 눈빛을 보니 이해도 갑니다. 일단 안정이 필요한 구석 침대로 안내해 안전벨트를 풀고 이불을 이쁘게 침대에 눕힙니다. 이불에 이불도 덮어 주고요. 자기는 보호자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군요. 보호자에게 환자 접수를 시켰더니 끝끝내 집나간 남편 이름을 댑니다. 뭐 그러라고 하죠. 생체 징후는 어떻게하죠? 일단 이불의 혈압을 잴 수 없으니 보호자의 혈압을 잽니다. 그러면 주 호소 증상은 이정도가 될까요? '이불이 배가 아프다고 주장해요.'

4

 챠지 간호사 L(30, 여)씨는 옳은 소리라고 헛소리만 해대는 신규 간호사와, 정말 헛소리만 하는 환자들 때문에 당장 때려치고 싶은 생각입니다. 방금도 그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엑팅 J를 눈물이 쏙 빠지게 혼냈습니다. 도저히 일이 늘지 않는 친구 같습니다. 그 와중에 신환은 미어 터지게 오는군요. 이러다 응급실이 정말로 빵 터져나갈 분위기입니다. 휴, 또 신환이 왔나 보군요. 살살 내 눈치를 보던 J가 조심스럽게 환자를 받은 종이를 내밉니다. 주 증상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불이 배가 아프다고 주장해요" 아니 이건 또 뭔소리라는 건가요 ! 아무래도 너도 그만두고 나도 그만둘 때가 왔나봅니다. 이젠 물어볼 기운도, 혼낼 기운도 없어요. 그냥 챠트나 이쁘게 고쳐 놓습니다. "배가 아파요."

5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P(28, 남)씨는 벌써 열 여섯시간 동안 연속근무중입니다. 방금도 취객이랑 멱살을 드잡고 부모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냥 싹 다 앓다 죽던지 던져놓고 도망가버리고 싶군요. 아휴, 잠시 격무에 지친 몸과 머리를 쉬는 방법은 당직실에 발뻗고 네이버 찌라시나 보면서 오더를 뿌리는 것입니다. 열 여섯시간동안 유도탄처럼 환자와 노티는 쉬지않고 나를 쫓아오거든요. 이게 그나마 시간이나 좀 버는 법이죠. 짬이 좀 먹었으니 이제 챠지가 만들어놓은 전자 챠트만 보면 오더 정도는 자유롭게 뿌릴 수 있습니다. 아, 방금도 배가 아프고 생체 징후가 안정적인 중년 남자가 한명 왔습니다. 이런 사람은 수액 달고 피검사 하고 사진 찍어 놓으면 진료가 편합니다. 이렇게, 루틴 오더를 긁어서... 주사제도 섞어주고... 빠르죠?

6

 응급실 인턴 K(26, 여)씨도 열 여섯시간 연속근무중입니다. 응급실 근무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는데, 기대보다도 더 생지옥입니다. 별에 별일이 다 눈앞에서 벌어지는군요.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밥도 한끼 못먹어서 눈알이 핑글핑글 돕니다. 뭐든 먹을거리로 보이네요. 그 와중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환자와, 쌓여가는 수액 세트가 원망스럽습니다. 아, 수액이나 달면서 좀 쉴 궁리 해야겠군요. 마침 성인 남자의 수액 세트가 나옵니다. 저거네요, 쉬운 라인이나 달면서 좀 먹을 궁리나 해야겠습니다.

  X 님 수액좀 맞으실... 아 저게 뭐지요 ! 이불이 이부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고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 X님 어디가셨나요? 보호자로 보이는 아줌마는 광채나는 눈빛으로 이불을 가르킵니다. 화장실 가셨나요? 아니랍니다. 이거랍니다. 이거야 말로 아노미입니다. 존경하는 P선생님이 직접 이불에다가 수액을 지시한거겠죠? P 선생님은 틀린적이 없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말라가는 나무에 영양제를 꼽는 것 같은건가요? 응급실 근무 경험이 미천해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야 인턴인가요? 그렇다면 주사제는? 소변검사는? 엑스레이는요? 정말 응급실은 별별 일이 다 있다는데, 이거야 말로 인계장에도 없고, 들어본 봐도 없는 상황입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러 온 챠지 간호사 L은 한데 엉긴 이부자리를 보고 혼잣말합니다. '내일 사직서를 내고 고향에 좀 가봐야겠어. 그동안 부모님에게도 소흘했고...'

7

  간밤에 정신병환자 S씨를 정신과 격리실에 황급히 처박은 의료진은 날밝은 아침에 펄펄 끓는 감자탕 앞에 마주 앉습니다. 물론, 소맥도 진하게 말아서지요. "건배합시다. 우주 최초로 이부자리에다가 수액 세트를 처방한 레지던트 P 를 위해서! 그리고 지구에서 복통을 앓는 모든 이불을 위해서!"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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